강석희 어바인 시장이 1일 연방하원의원 출마를 공식 발표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성실과 끈기로‘유리천장’을 뚫었다
미국 오자마자 ‘서킷시티’세일즈맨 성공신화 시작
4.29폭동에 정치 눈 떠… 2만 가구 발품 시의원 당선
현직 프리미엄 없는 신설 연방하원 선거구‘행운’
어바인 시장 강석희(58). 그는 또 정치인으로서 ‘무지 성실한 사람’으로 통한다. 시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무려 2만가구를 훑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민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열흘만에 선거운동원들이 모두 나가 떨어지더라”고 했다. 강 시장은 정계 입문 7년간 7만5,000여명에 달하는 유권자 대부분을 직접 만났고 이를 연인원으로 계산하면 100만명은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 전국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공화당 지역인 어바인에서도 공화당 후보들이 가장 겁내 하는 인물이다. 그는 선거에 관한 한 ‘무지 운 좋은 놈’으로 통한다. 처음 어바인 시의원에 도전할 때 어바인 시의회의 실력자인 레위 에이브런 변호사와 베스 크롬 시장이 한미민주당협회 회원으로 있을 때 우연히 맺은 인연으로 강 시장을 두발 벗고 지원하고 나서 주변을 놀라게 하더니 시장에 출마할 때는 베스 크롬 시장이 임기제한에 묶여 출마하지 못하자 강 시장 지지를 선언해 시장 당선으로 이어졌다. 또 이번에는 연방하원 도전을 결심하자 지역구가 신설돼 현역 의원 프리미엄에 대한 부담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성실하고 운좋은 강석희 시장이 연방 하원의원 도전을 선언했다. 34년 전 막연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도미해 아시안 첫 어바인 시장을 두 번씩이나 역임하고 연방하원의원에 도전장을 낸 이민 1세 강석희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세일즈맨에서 정치 입문까지
보성고와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강 시장은 지난 1977년 형님과 누나가 사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안고 도미했다. 강 시장의 미국 첫 직장은 전자제품 판매 체인 ‘서킷 시티’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석 달만 기회를 주면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장담했다.
타고난 성실함, 친절함으로 매장에서 그의 세일 실력을 따를 자가 없었다. 입사 3개월 만에 판매왕에 올랐고, 2년 만에 스토어 매니저가 되더니 5년 뒤에는 수퍼스토어 매니저가 되는 등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1990년에는 수년째 적자가 계속되던 오렌지카운티의 플랙십 스토어 매니저가 돼 단 4개월 만에 흑자로 반전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는 “미국 온 후 처음으로 미국도 별것 아니구나.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도 잠시였다. 미 전국 최고의 실적으로 회사의 모든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웠지만 회사 측은 강 시장의 디스트릭 매니저 승진을 거절했고 비로소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15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그는 그의 저서 ‘유리 천장을 넘어서’(Beyond the Glass Celing)에서 “처음으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세일즈 실력을 믿고 신발가게를 차렸다. 고객을 생각하는 업주로, 정직한 업주로 소문이 나면서 사업이 번창했고 사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1992년 4·29폭동은 강 시장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한인들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참상을 보면서 한인사회에 정치가 없음을 실감했다.
강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비민주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생각했다. 이때 미국은 한인사회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결국 한인사회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했다”고 말햇다.
이후 강 시장은 1993년 한인장학재단 이사를 시작으로 한미 민주당협회 회장, OC 한미연합회 이사장, 한미장학재단 서부지부 회장, 주지사 정책자문위원, 남가주 고대교우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했고 한인 정치력 신장운동에서 깊이 발을 들이면서 점차 정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바인 최초의 유색인 시장에서 연방 하원의원 도전까지
한미 민주당협회장과 OC 한미연합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민주당을 중심으로 정계인맥을 넓혀가던 강 시장은 후원자를 자임한 베스 크롬 어바인 전 시장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2004년 27년 간 거주하던 어바인에서 시의원에 도전했다.
출마 선언 후 5개월 동안 무려 2만 가구를 직접 방문하는 ‘발품 선거운동’을 벌여 그야말로 무명이었던 풋내기 강 시장은 첫 도전에서 당당히 어바인 시의원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강 시장은 자신의 소신인 공교육 강화와 경제 활성화에 주력했고, OC 그레이트팍 이사, OC 하수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 주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강석희는 약속을 지킨다’는 주민들의 믿음은 2006년 재선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2008년 11월4일 한인 이민 1세 최초의 직선 시장이자 어바인시 사상 최초의 유색인 시장에 당선됐다. 강 시장의 당선은 당시 LA타임스도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공화당 성향의 상공회의소로부터 ‘올해의 인물상’을 수상할 정도로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주력했고 특유의 성실함과 진보에 치우치지도 보수를 배척하지도 않는 중도 정치에 성공하면서 2010년 68%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 시장에 당선돼 미 전국에서 주목 받는 유망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이때 강 시장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기기 시작됐다. 재선에 성공하자 주변 인사들로부터 ‘다음 수순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7개월여의 고민 끝에 한인사회를 대변하는 연방 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대학동문 아내 조앤 강씨와 1남1녀
■가족관계 - 지난 1977년 대학동문인 조앤 강씨와 결혼, 1남1녀를 두고 있다. 부인 조앤씨는 어바인다문화협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전통무용 공연 등으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아들 앨런은 UC샌디에고와 USC MBA를 졸업, 현재 다국적기업 존슨 앤 존슨에서 연구과학자로 근무하고 있다. 딸 앤지는 UC버클리 볼트홀 법대를 졸업, L&W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어바인·코스타메사 등 백인 75%
■강 시장 출마 선거구는
강 시장이 출마하게 될 지역구는 어바인, 코스타메사, 알리소비에호, 실비치, 헌팅턴비치, 라구나니겔 등을 포함하는 신설 통합선거구로 백인 유권자가 75%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공화당 우세지역이다. 5% 정도로 추산되는 한인 유권자를 포함한 아시아계 유권자는 약 14% 정도이며, 라틴계 10%, 흑인 1% 유권자로 구성되어 있다.
유권자들의 정치성향은 민주당 29%, 공화당 43%, 무당파 28%로 공화당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 후보는 이 지역에서 49%의 지지를 확보해 48%에 그친 매케인 후보를 눌러 이변을 나타내기도 해 민주당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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