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 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정진규(1939~) ‘슬픈 공복’ 전문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아득하고 춥고 오한이 드는 것은, 내 자신도 흐르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아니, 나보다 먼저 길 떠날 채비를 하는 마음 때문이다. ‘찬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과 ‘휑하니 뚫린 밭고랑’으로 보이는 호미 한 자루. 홀로 잠겨 있는 낚싯대라든지 시린 물에 발 담그고 있는 갈대 등등. 11월 초입을 버티고 있는 화자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머잖아 자신을 삼킬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이 그런 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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